“무엇보다 나에게는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그것을 인내하고 그 너머를 상상할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이제 그 힘을 상상력이라고 부르겠다.”
-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중에서
김초엽 작가의 소설에 등장하는 이 문장은 우리에게 상상력이 단순한 공상이 아닌, 현실을 넘어서는 힘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상상력은 종종 현실에서 멀어지는 것, 또는 달콤한 꿈을 꾸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되곤 하죠. 하지만 상상력의 진정한 가치는 지금은 가질 수 없는 것을 그려내며 현실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힘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자신의 질병 경험에 상상력을 더해 접근성 문제를 탐구해 온 안희제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려 합니다. 그가 말하는 상상력은 “아픈 사람, 특히 앞으로 낫지 않을 아픈 사람이 있는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그리는 능력입니다. 배리어프리를 넘어 영세한 접근성과 감각 번역을 고민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무엇을 함께 상상할 수 있을까요?
|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에세이와 칼럼부터 문화, 예술, 사회 비평까지 다양한 주제와 형식의 글을 쓰는 연구자이자 작가입니다. 주변부나 경계에 있는 존재들에 관심이 많고, 그 위치에서 중심을 재해석함으로써 변화를 도모하고 싶다는 목표를 가지고 작가 활동과 연구 활동을 하고 있어요. 보통 사회적 소수자 혹은 사회적 배제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이를테면 장애인이나 만성질환자, 여성, 퀴어와 같이 사회적 배제의 대상이 되는 분들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 처음 장애인권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제가 수험생활을 하던 시기에 크론병 진단을 받았어요. 원래는 아마추어 배드민턴 선수를 할 만큼 건강했는데, 진단 이후 원래 생각했던 앞으로의 삶의 기획이나 진로가 많이 흔들렸죠. 대학 입학 이후, 장애인권 동아리에서 진행한 배리어프리 영화 상영회를 보러 갔어요. 그곳에서 청각이나 시각을 사용하지 않고도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고, 그 경험을 시작으로 장애인권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질병 경험에서 출발해 장애인권 활동을 했다고 할 때, 질병과 장애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가장 흔한 편견 중 하나예요. 장애를 질병으로 보거나 “장애를 앓는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질병과 장애를 구분하지 않는 편견인데, 당시에는 저도 그런 편견에서 출발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시작해 글도 쓰고, 학교 내 제도 개선을 위한 캠페인도 하고 또 시민연극에도 참여했죠.
| 연구자, 비평가, 작가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계신데, 가장 의미를 두는 영역은 어디인가요?
연구자와 작가의 영역이 겹치는 지점, 즉 비평가의 영역에 가장 큰 의미를 두고 있어요. 작가로서는 더 많은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대중적인 글을 쓰고 싶고, 연구자로서는 세상에 필요한 지식을 정확하게 생산하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요. 비평이라는 형식이 이 두 욕망의 타협점 같아요. 비평은 자유로운 형식 안에서 논리적 비약이 어느 정도 허용되면서도,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새로운 이야기를 해야 하는 장르죠. 연구자와 작가로서의 욕망, 양쪽의 직업적 책임을 비평가라는 영역에서 조합할 수 있어 의미가 큽니다.
| 도서 <난치의 상상력>을 흥미롭게 봤습니다. ‘난치’와 ‘상상력’이 쉽게 결합할 수 있는 단어는 아닌 것 같은데, 이 두 가지를 연결한 이유가 궁금했어요.
상상력이란 지금 없는 무언가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제 관점에서 지금 없는 것은 ‘아픈 사람, 특히 앞으로 낫지 않을 아픈 사람이 있는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었어요. 지금도 그런 세상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난치와 상상력을 결합했어요.
‘난치의 상상력’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어요. 첫째는 ‘난치 질환을 경험한 사람의 상상력’이라는 의미예요. 아픈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특별한 관점을 갖게 돼요. 예를 들어, 저는 크론병을 앓게 된 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접근성이나 포용성 같은 문제에 더 민감해졌고, 아픈 사람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상상하게 됐죠.
두 번째는 ‘치유되지 않는 상상력’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어떤 중요한 경험을 한 후에는 그 이전의 상태로 완전히 돌아갈 수 없잖아요. 제게는 질병이 그런 경험이었어요. 예를 들어, 저는 아직도 배드민턴 선수였을 때 높이 점프해서 스매시를 하던 느낌과 스텝을 몸이 기억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 몸의 기억이 실제로 실현될 수 없는,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됐죠.
제 상상력은 질병으로 인해 완전히 변화했어요. 이 변화는 ‘치유’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질병 이전의 저로 완전히 돌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저는 이렇게 변화된 상상력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아요. 오히려 이 ‘치유되지 않는 상상력’을 그대로 간직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그려나가고 싶어요. 질병 경험이 남긴 흔적을 지우려 하지 않고, 그 경험과 함께 살아가는 상상력을 만들고 싶다는 의미에서 ‘난치의 상상력’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 책에서 특히 강조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이 책에서 가장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질병이나 장애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아픈 사람이 낫기를 기대하고, 낫지 않으면 그것은 개인의 책임이나 실패로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하지만 저는 아픈 사람이 ‘아픈 채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만성 질환이나 크론병을 앓고 계신 분들의 책 후기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을까요?
아픈 사람들이 남겨주신 모든 후기가 소중해요. 공통적인 이야기가 많았는데, “아픈 게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거나, “나에게 필요했던 이야기가 여기 있었다”는 말씀이 많았어요. 위로를 받았다는 분들, 속이 시원하다는 분들도 있었고요.어떤 분들은 고통의 묘사가 너무 디테일해서 크론병 진단을 받은 직후에는 겁을 먹었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끝까지 읽으면 아픈 사람의 더 나은 삶을 위한 다양한 선택지가 가능하다는 것, 내 몸이 변하지 않더라도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발견했다고 해서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