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 기획을 위해서 학술 논문과 정책 보고서를 읽다 보면, 종종 김빠지는 결론을 마주합니다. 예컨대 “취약계층 청년 지원을 위한 전담 기구 구축이 필요하다.", "지역 특화 콘텐츠 개발이 지역 소멸 방지에 도움이 될 것이다."와 같은 말이죠.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에요. 그러나 실제적인 변화를 끌어내기에는 다소 추상적이고 일반적이죠. 이미 아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데 그칠 뿐이죠.
한편으로는 연구 과정에서 ‘당사자의 목소리’를 강조하면서도, 현장의 의견을 사업에 반영하거나 현실적 변화로 이어지게 하는 데에는 매번 실패하죠. 당사자의 목소리를 잘 담은 연구라도, 정작 그들의 삶에 아무런 변화를 만들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요.
어떻게 하면 연구가 단순한 학술 활동이 아닌 진정한 변화의 도구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보고서가 그저 책꽂이를 장식하는 종이 뭉치가 아니라, 실제로 변화를 만드는 도구가 될 수 있을까요? 듣는연구소 우성희/백희원 님의 글을 통해서 질문에 대한 답을 어렴풋하게나마 찾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저출산, 고령화, 지역의 인구소멸 같은 문제들이요. 최근에는 한 국책연구소의 저출산 대응 이슈페이퍼*에서 “여성을 1년 조기 입학"시켜 남녀 간 매력을 느끼도록 하자(?)는 제언부가 언론에서 하이라이트 되며 국민의 공분을 사는 일도 있었지요. 대체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질까요? 아이를 낳기 어려운 이유에 대해 사람들은 충분히, 계속 이야기해오지 않았던가요? 지나치게 긴 노동시간, 과도한 사교육 경쟁, 고질적인 임신 출산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 그런데 대체 왜? 사실 이런 사례는 회사에서도, 동네에서도, 어디에서건 빈번히 벌어지곤 합니다.
* 생산가능인구 비중 감소에 대응하기 위한 재정정책 방향에 대한 제언(장우현) 재정포럼 2024년 5월호.
듣는연구소는 현장과 솔루션의 분리라는 이 고질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연구자들이 모여 만들었습니다. 수많은 설문조사, 공청회, 공론장, 주민간담회… 그런 것들이 말을 잘 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설계가 잘못되어서? 횟수가 너무 적어서? 우리의 가설 중 하나는 전체 프로젝트에서 현장의 목소리 청취가 단순 ‘데이터 수집 활동'의 일환에 그치고, 실제 분석과 솔루션 도출 및 적용 과정에는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난 당사자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했으므로, 타당한 솔루션은 이것입니다’라는 구조가 아니라, 연구를 설계할 때부터 이미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결론을 쓴 뒤, 거기에 현장의 목소리는 ‘한편, 주민의 의견은 이러저러합니다'로 부록처럼 추가되어있는 경우가 그렇겠죠. 그런가 하면 반대로 주민의 목소리는 잘 반영했지만 예산, 인력 등과 같이 대안을 실행하기 위한 조건과 상황은 고려하지 않는 바람에 실행할 수 없는 당위적인 내용만 남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변화로 이어지는 ‘잘 듣는 연구'라는 것이 당사자와 여러 이해관계자의 이야기를 경청하고(표면적으로 말해지는 것 이면의 욕구), 이들의 문제의식이 연구 전체에 녹아들 수 있도록 연구의 기획과 분석 과정 전반에 참여할 자리를 만들고, 여러 이해관계자와 함께 솔루션을 만들어가는 연구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쪽의 목소리만 듣는 게 아니라, 여러 이해관계자의 목소리를 함께 듣고, 연구 과정에서 토론이 일어나고, 다양한 맥락을 고려해 솔루션을 도출하는 것이죠.
즉, 듣는연구소가 말하는 잘 듣는 연구란 당사자와 이해관계자가 잘 ‘참여'한 연구입니다. 다행히도 세상엔 바로 그런 연구방법을 고민하는 많은 연구자, 정책가, 교육자, 커뮤니티 활동가, 지역 리더, 등등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고 배우고 직접 우리의 연구에 적용해보기도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계속 살펴볼까요?
🛣️ 현장과 함께 변화를 만드는 연구
잘 참여한 연구란 무엇일까요? 연구 목표나 여건에 따라서 이해관계자의 참여 수준은 조금씩 다릅니다. 인터뷰이로 참여한 당사자가 분석 결과를 검토한 후 피드백을 보고서에 반영하는 낮은 단계의 참여부터, 연구 전 과정에 당사자와 이해관계자가 공동 연구자로 참여하는 높은 단계의 참여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설계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를 넘어, 당사자가 직접 연구하고, 연구자는 연구 진행 과정에 도움을 주면서 공동으로 지식을 생산하는 연구도 시도해보았습니다.)
연구와 실행을 적절하게 병행하여, 목적한 변화를 이루고 그것의 의미도 도출할 수 있는 연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저희가 학습하고 적용해 본 액션리서치(Action Research)는 이 질문에 좋은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혁신 활동이 장기적으로 현장의 변화를 만드는 것이라면, 이 개념과 방법은 그 변화를 좀 더 입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액션리서치란?
“액션리서치는 긴급한 관심사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참여하는 이론과 실천, 행동과 성찰을 결합하는 것입니다.” - Hilary Bradbury, (2015) Sage Handbook of Action Research 3rd Edition
액션리서치(AR, Action Research)는 현실에서 장기적이고 본질적인 변화를 만들기 위해 고안된 연구방법론입니다. 연구방법론은 어떤 데이터를 사용했느냐로 구분되는 경우가 많지만(예. 문헌연구, 질적 연구, 양적 연구) 액션리서치는 연구에 대한 독특한 ‘관점'과 ‘태도'를 특징으로 합니다.
학술연구는 객관적이고 타당한 지식생산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컨설팅은 실행가가 제공하는 솔루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액션리서치는 연구에 기반해 실행하고 또 실행을 통해 지식을 생산하는 구조입니다. 인용처럼 ‘이론'과 ‘실천'을 결합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액션리서치가 연구나 컨설팅과 구분되는 지점은 ‘전문가'와 ‘당사자' 사이에 위계가 없다는 점입니다. 연구자와 이해관계자가 동등한 위치에서 공동으로 지식을 생산하지요. 둘은 동등한 동료 관계로 함께 합니다. 그래서 액션리서치 방법론에서는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문제를 정의하고, 지식을 만들고, 대화하고 다시 공유하는 기술이 담겨있어요. 이 글에 담긴 많은 내용도 이로부터 배운 것이랍니다.
전문가들조차도 아직 액션리서치의 기원이 무엇인지 합의하지 못했지만, 초기에 시작한 이들로 르윈(Kurt Rewin 1890-1947)과 듀이(John Duewy 1859-1952)가 많이 언급됩니다. 이들은 고립된 실험실에서 이뤄지던 연구를 실제 지역사회, 직장, 학교, 가정과 같은 현장 환경으로 옮겨 체계적으로 실행하고 반복해서 평가하는 방식을 열었습니다. 실용적인 지식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그곳에서 만들어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참고: Hilary Bradbury(2017) Cooking with Action Research Resources, AR+. / Hilary Bradbury, (2015) Sage Handbook of Action Research 3rd Edition
🤔 특징과 요소
첫째, 참여와 실천, 연구를 결합하여 생각하기
사회 혁신 현장에서 실행 프로젝트 따로, 연구 따로 추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한 실천을 하고, 그 영향을 추후에 따로 연구하는 방식이지요. 그것이 ‘객관적’으로 이 사업의 성과나 시사점을 알려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객관적’인 효과의 증명을 통해 사업의 지속을 제3자에게 설득해야 한다거나 고도의 연구 기술을 필요로 하는 등 연구를 따로 추진할 필요가 있는 경우가 있지요. 그러나 사회 현장의 변화를 목적으로 한다면 직접 실행에 참여한 사람들이 함께 실행 경험에서 지식을 생산하는 것이 더 적합한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현장의 변화를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지 기획하고 설계하기 위한 연구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실제 현장에서 목표에 부합하는지 진단하고 개선 방안을 찾기 위한 연구
연구를 통해 얻은 실행의 성과와 의의, 시사점과 개선방안을 연구하여 그 결과를 당사자와 이해관계자가 수용하여 다음 실행으로 옮기는 것이 필요한 경우
는 외부 연구진이 ‘객관적으로’ 진행하는 것보다 당사자와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며 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둘째, 이해관계자들이함께 변화를 만드는 추진 체계 조직하기
한 주체의 변화가 시작점이 될 수는 있으나 진정 큰 스케일의 변화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양한 이해관계자(현장의 당사자, 당사자의 변화를 만들고 싶은 활동 주체, 지원 기관, 공공 영역 담당자 등)의 상호협력은 변화의 힘, 크기, 지속성을 위해 필수적입니다. 이해관계자들은 궁극적으로 당사자나 현상의 변화라는 거시적 목적을 공유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보면 각자 역할과 처한 상황, 조직의 미션, 담당자의 전문 분야와 권한 등에 따라 조금씩 상이한 목표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같지만 상이한 목표를 조금씩 조정하여 이번 사업에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목표를 설정하는 작업이 초반에 필요합니다. 주의할 점은,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수준으로 뭉뚱그리고 넓게 범위를 잡는 것이 아니라, 서로 차이를 드러내고 확인하여 조정하면서 뚜렷하고 뾰족한 목표로 좁히는 것입니다. 그래야 형식적인 참여가 아닌 실질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 수 있습니다.
셋째, 거시적 목표 속에서 단위 프로젝트 사이클의 목표와 계획을 세우기
큰 변화는 단번에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연간 단위 또는 여러 프로젝트를 거치면서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해가는 장기적 관점이 필수적입니다. 프로젝트 일정 관리표처럼 기획으로 시작해 결과물 산출로 마무리되는 선형적 프로세스가 아니라 ‘나선형 프로세스'로 사고해봅시다. 우리가 하는 일은 반복과 진화입니다. 성찰 - 계획 - 실행 - 관찰 - 성찰 - 계획 -실행 - 관찰이 빙글빙글 돌아가지요.
한 번 자문해보세요. 새로운 사업은 기존 사업에 대한 성찰을 반영하며 계획되고 있나요? 사업의 시사점은 담당자의 경험치뿐 아니라 조직이나 후임자, 이해관계자에게도 공유할 수 있는 형태의 지식으로 전달되고 있나요? 사업을 실행하면서 조사와 관찰을 통한 데이터가 구축되고 있나요? 그러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업에 대한 성찰이 이뤄지고 있나요? 이러한 관점으로 장기간의 비전과 미션을 이번 프로젝트 단위 사이클에서는 어떻게 가져갈지에 대해서 개인과 조직이 공유해봅시다.
연구를 통해 함께 변화를 만드는 법
연구를 통해 함께 변화를 만드는 법
연구를 통해 함께 변화를 만드는 법
연구를 통해 함께 변화를 만드는 법
연구를 통해 함께 변화를 만드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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