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복지혁신을 이끈 화제작 <래디컬 헬프>를 쓴 힐러리 코텀은 TED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제를 안고 있는 당사자야말로 해결책의 열쇠를 쥐고 있다." 전 세계 복지 현장에 큰 반향을 일으킨 이 책은 당사자들의 경험과 지혜를 신뢰하고, 이들이 스스로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오늘 뉴스레터에서는 『아빠의 아빠가 됐다』, 『새파란 돌봄』의 저자이자 돌봄청년 커뮤니티 'N인분'을 이끌고 있는 조기현 작가님을 통해 이러한 철학이 현장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만나보려 합니다.
이번 회차는 당사자들의 자조 활동이 어떻게 의미 있는 사회 변화로 이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소중한 기록입니다. '영영케어' 멘토링 프로젝트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소수자를 위한 새로운 지원 방식의 가능성과 당사자 목소리를 통한 사회문제 해결의 새로운 관점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구독자분들 중 영케어러를 포함한 다양한 소수자 지원 단체와 유관 기관 실무자가 계신다면, 당사자 중심 접근법의 구체적인 방법론과 실행 노하우도 얻으실 수 있을 거예요.
아픈 가족이자 친지를 돌보는 청(소)년을 지원하는 제도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대선이 한창이던 2021년 말, 한 청년의 간병살인 문제가 이슈화됐고, 2022년 2월 정부는 ‘가족 돌봄 청년[영 케어러] 지원대책 수립 방안’을 내놓았다. 이후 지자체, NGO, 복지관, 기업 사회공헌팀 등의 영케어러 지원이 확산됐고, 마침내 올해 2월 27일 ‘가족돌봄 등 위기아동·청년 지원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제 영케어러를 위한 전달체계가 전국으로 확대될 참이다. 앞으로 더 세심하게 정비해 나가야하지만, 제도의 변화는 발 빠르게 이뤄졌다.
하지만 사회적 소수자를 지원할 때, 제도의 변화만큼이나 당사자들의 변화도 중요하다. 스스로 자신의 소외를 해석하고 목소리내며 나아가는 힘 말이다. 그 힘은 당사자들이 모여 서로 돕는 자조력과 공동으로 미션을 해결해 나가는 자치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자조적이고 자치적인 당사자의 활동이 제도적 지원과 맞물린다면 더 튼튼한 안전망을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나를 알아주는 어른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거 같아요.”
영케어러 자조모임을 할 때마다 자주 나오던 이야기다. 지난날 살아남기 위해 분투했던 시간들을 나누다보면 경제적 빈곤, 사회적 위축, 돌봄 부담만큼이나 고립감의 문제가 크게 대두된다. 아픈 이를 돌보느라 가정에서, 병원이나 공공기관에서, 학교나 직장에서 겪는 어려움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어떨까? 사회적 서비스의 필요만큼이나 고립감을 해소할 수 있는 ‘관계망’의 필요 또한 높았다.
2023년 말, 우리는 자조모임이나 정책 제안만 할 게 아니라, 직접 사회적 역할을 해보자는 마음을 모았다. 그토록 필요로 했던 어른의 존재, 우리가 되어보자는 마음이었다. 돌봄 상황에서 겪는 어려움을 공감하고 함께 머리를 맞대는 사람, 내가 돌볼 줄 몰라서 좌충우돌하며 얻은 돌봄노하우를 공유하는 사람, 돌보느라 더 나은 미래가 없을 것 같이 느끼는 사람에게 나도 너와 닮은 경험을 했지만 이렇게 살아가고 있노라고 손 내미는,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면 돌봄청(소)년의 고립감은 많이 해소되지 않을까?
이런 질문을 실현한 게 ‘영영케어’ 멘토링 프로젝트였다. 영영케어는 ‘노노케어’를 패러디한 말로, 영케어러가 영케어러를 지원한다는 의미를 담은 명칭이다. 나는 2023년 5월에 진행한 ‘영케어러와 돌봄의 위기’의 연사로 참여하며 SIT와 관계를 맺었고, 그해 10월쯤 SIT에 멘토링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제안은 곧바로 성사되어 11월부터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영영케어 1기(2023년 11월~2024년 4월)와 영영케어 2기(2024년 7월~2024년 11월)를 진행했다. 영케어러인 청년들이 11명의 멘토로 양성됐다. 양성과정을 거치지 않고 멘토로 함께 한 청년들까지 포함하면 총 16명이다. 이 프로젝트가 끝나고도 멘토들의 활동이 복지관과 연결되며, 현재 총 71회의 멘토링을 진행했으며 누적 516명(실 인원 80여명)의 돌봄청소년을 만났다. 이 글은 영영케어의 진행 과정을 소개한다. 많은 기관이나 단체가 영케어러 동료상담 혹은 동료지원(Peer support)을 수행하길 바라며 기록을 공유한다.
우선 멘토를 모집해야 했다. 모집은 ‘돌봄청년 커뮤니티 n인분’의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페이지에 포스터와 소개글을 올리고, 다양한 질병이나 장애 카페의 자유게시판, 자조모임 단톡방 참여자들에게 외부 공유를 부탁하며 진행했다. 19~39세 청년 중 영케어러였거나 영케어러인 이들을 중심으로 모집했다. 홍보 문구는 아래와 같았다.
영케어러를 지원하는 나라들은 영케어러를 ‘숨은 집단’(Hidden army)라고 부른다. 존재하는 건 알지만 사회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의미로 붙인 명명이다. 사실 1명도 신청하지 않으면 어쩌나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걱정이 무색해졌다. 순식간에 14명이 신청했다. 그 중 끝까지 참여할 수 있는 이들을 추려 6명으로 1기 양성을 출발했다. 2기는 모집 기간이 촉박하여 많이 신청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5명이 새로 모집됐고, 양성과정 없이 참여할 수 있는 이들도 초대해 총 10명이 멘토 활동을 이어갔다. 사실상 모집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어려움 없이 모집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는 게 컸다.
영케어러가 숨은 집단이 되는 이유 중 하나는 복지 신청주의라고 할 수 있다. 여전히 복지를 신청하는 건 나의 무능을 증명하는 낙인감으로 다가오고, 빡빡한 신청 기준 앞에 서면 신청해도 안 될 것 같다는 무력감이 몰려온다. 하지만 영영케어와 같은 멘토링 프로그램은 너의 무능을 증명하기보다 너의 역량을 증명하며 사회에 기여하자는 제안이다. 서비스의 수혜자를 넘어 활동의 주체가 되길 권한다. 더불어 빡빡한 신청 기준이 있는 복지도 아니니, 내가 돌봄 경험이 있고 에너지만 있다면 신청 가능하다. 홍보 채널만 확보된다면, 멘토들이 잘 모집될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다 돌봄 경험이 다른데 모여서 같이 대화하고 배우고 할 수 있나요?”
영영케어 프로젝트를 소개하다보면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정말 다양한 돌봄 경험들이 있다. 뇌병변장애, 지체장애, 지적장애, 조울증, 조현병, 고립은둔, 알코올의존, 치매, 말기암, 사별 등 돌보는 이들의 질병이나 장애의 종류만큼이나 돌봄의 양상이나 관계도 다양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우리는 영케어러라는 이름 아래 모였지만, 우리는 다 다른 사람이라는 걸 인식하는 일이다. 오히려 다름과 차이 덕분에 서로 인식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런 계기를 만들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건 그라운드룰이다. 충고, 조언, 평가, 판단, 즉 ‘충조평판’을 하지 않고 ‘경청하기’는 모든 과정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멘토가 모집됐다면 교육 과정을 진행한다. 영영케어 1기는 총 5회기, 2기는 총 8회기 멘토 양성 과정을 진행했지만, 1기와 2기 교육을 관통하는 큰 흐름은 동일했다.
1. 나의 돌봄 경험을 돌봄 생애주기 그래프로 그리며 공유한다. 돌봄을 한 것 뿐 아니라 돌봄을 받은 것도 공유하면서 돌봄이 주고받는 것임을 느낀다. 돌봄 경험을 안전한 관계 안에서 말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는 ‘자유로움’을 얻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비로소 ‘나다움’을 인정받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야기장은 자신의 돌봄 경험에 거리를 두며 억울함이나 죄책감 등에 파묻히지 않을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다.
2. 관계맺음과 알아차림에 집중한다. 성찰의 시선을 본격적으로 ‘나’에게 둔다. 나는 지난날 어떤 상황에서 관계가 불편했고 그 불편함은 어떤 감정인지 알아본다. 반대로 내가 신뢰를 느끼는 관계는 왜 그렇게 느끼는지 확인한다. 행위 워크숍이나 이미지 카드 활용으로 동적인 교육을 진행한다. 동적 활동으로 몸이 열리면 마음도 자연스레 열리게 된다. 몸의 열림은 멘토들 간의 신뢰 형성을 돕고, 이후 교육의 흡수력을 촉진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3. 청소년 위기 양상과 상담 방법을 배운다. 시선은 ‘나’에서 구체적인 ‘너’로 향하게 된다. 오늘날 청소년 위기, 즉 중독, 폭력, 우울, 자해, 사이버성폭력 등의 사례를 익히며, 상담 기술을 습득한다. “한주 어떻게 보냈어?”와 같은 개방형 질문과 “한주 잘 보냈어?”와 같은 폐쇄형 질문이 주는 차이를 느끼며 질문법을 고민하고, 대화 없이도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대표적인 비언어적 표현을 숙지한다. 익히는데 그치지 않고 서로 짝을 이뤄 실습까지 진행한다.
4. 복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홈페이지, 채널, 창구 등을 확인하고, 실제 서비스 연결이 된 사례들을 듣는다. 활동은 주로 서울시 및 수도권에서 진행했기에 보조금24, 맞춤형급여안내, 내 손안에 서울, 청년몽땅정보통, 온통청년, 서울시 가족돌봄청년 지원사업 WAY 등 정보 플랫폼을 숙지한다.
5. 마지막은 멘토의 역할 정립과 멘토링에 필요한 실무 파악이다. 멘토는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영케어러가 겪는 돌봄의 문제는 단박에 해결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다만 어려움 속에서 곁에 함께 하며 말하고 싶을 때 들을 수 있는 귀가 되고, 무언가 듣고 싶을 때 말해줄 수 있는 입이 되는 것이 최선일지 모른다. 그 이상으로 무언가 해결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들기 시작하면 결국엔 무력감이 나를 먼저 덮칠 수도 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우리는 곁을 함께 하는 사람이고, 도움이 필요하면 사회복지사나 사례관리사에게 연결하는 사람이라는 걸 확실히 한다. 멘토링 과정에 어려움이 발생하면 지원이 가능하도록 소통하는 ‘멘토링 활동 기록지’ 작성법도 익힌다.
앞으로도 회차가 더 늘거나 줄어들 수는 있지만, 큰 흐름은 위와 비슷하게 진행할 예정이다. 여기서 약간씩 미디어 시청이나 선배 멘토 사람책, 현장 탐방 등을 넣는 방식으로 양성 과정을 변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