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어떤 한 해를 보내셨나요? 2024년, 저출생과 고령화는 더욱 가팔라지고, 기후 위기는 더욱 가까워졌으며, 한쪽에선 주 4일제를 논하지만 다른 한쪽에선 투잡·쓰리잡이 일상이 되었고, AI가 삶을 바꾸리라는 기대와 불안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변화하는 시대, 비영리·공익활동 조직은 어떤 방향으로 걸어가야 할까요?
오늘의 Pick 레터에서는 2회에 걸쳐 가치혼합경영연구소 김재춘 소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려 합니다. 이번 1편에서는 비영리·공익활동 분야가 마주한 위기와 기회 요인을 살펴보고, 2편에서는 우리가 준비해야 할 혁신 전략과 실천 과제를 제시할 예정입니다.
현장의 목소리와 경험을 접목한 이 글이, 새해 사업 계획을 준비하는 비영리·공익활동 참여자들에게 든든한 길잡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차가운 겨울, 갑작스러운 국가 비상사태에 놀라 거리로 나온 시민들의 옷차림은 8년 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지만, 집회 현장의 분위기부터 모인 이들의 특성과 손에 쥔 도구들은 꽤 많이 달라졌다. 여느 집회처럼 광장에는 노조와 애드보커시(advocacy) 단체가 만든 작은 무대가 설치되었으나, 흘러나오는 음악은 기존 집회에서 듣던 민중가요나 투쟁가가 아닌 최신 K-팝이었고, 참여한 이들도 20~30대 여성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재기발랄한 깃발과 피켓, 그리고 이제는 ‘저항과 연대’의 상징이 된 응원봉이 촛불과 만장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 집회 현장 속에 현재 비영리 공익 ‘판’의 변화를 상당 부분 보여주는 키워드들이 담겨 있다.
모든 면에서 ‘빨리빨리’가 생활화된 대한민국 사회에서 사회·문화·경제적 변화는 어지러울 정도이다. 비영리 공익활동 역시 이 변화의 태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찌 보면 다른 어떤 영역이나 분야보다도 빠른 환경 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시류를 인지하고 대비한 단체들에게는 기회가 되겠지만, 가뜩이나 영세하고 자산·자원이 부족한 단체에게는 존립을 걱정해야 하는 위협으로 여겨지고 있다.
복잡한 사회문화적 생태계가 으레 그러하듯 비영리 공익활동도 하나로 정의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관련 단체들의 상황도 제각각 다르다. 그럼에도 이념적 지향, 활동 지역과 분야, 다루는 주제, 사업의 방식, 설립 법인격 등의 차이를 떠나 비영리 공익활동 영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몇 가지 현상들이 존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비영리 공익활동 단체들의 존재감과 효능감을 가장 잘 느낄 수 있을 때는 사회문제가 심화될 때다. 그래서 사회문제와 비영리 공익활동은 한 몸이고 공동운명체다. 하지만 문제의 양상은 수십 년 전과 비교하면 많이 달라졌다.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공익 의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한국 사회는 이미 선진국 반열에 올랐고 정치 민주화와 경제 발전도 상당 부분 이루었다. 거기에 한류의 성과로 국가적 자부심도 높아졌고, 정책과 제도를 비롯한 사회 시스템도 안정화되었으며, 삶의 기반이 되는 행정 체계와 사회 자본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개선되었다.
높은 교육열로 고등 교육이 일반화되었고, 인권에 대한 국민 의식도 크게 향상되었으며, 축적된 국가 재정을 바탕으로 보편적인 복지 수준도 높아졌다. 이러한 진보화 과정에서 한 축을 담당했던 비영리 공익활동은 빛과 소금의 사명으로 나름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고 현재의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활동가들과 단체들은 목숨을 걸고 인생을 갈아 넣어야 하던 암흑기를 지나왔기에, 이제야 비로소 한숨을 돌릴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사회문제는 쉬지 않고 달리는 폭주 기관차다. 인구 감소와 지역소멸, 사회경제적 불평등 심화, 기술 부작용(가짜뉴스 등), 환경 위기, 혐오와 갈등 심화 등 한국 사회가 경험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 시민사회의 생산성과 집중력은 예전만 못해졌다. 과거의 아젠다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으며, 새로운 문제들에 대한 대응의 수준과 강도도 과거의 성과를 상회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코로나19 시절 파이낸셜타임스는 “코로나19에 따른 재난 상황에서 전자상거래 업체들이 생활필수품과 재난 물품을 공급하고 있다”라며 “과거 적십자사의 역할을 아마존이 대체하는 시대가 열렸다”라고 전했다. 이는 전통적인 비영리단체들의 활동이 다른 주체들로 대체되는 현상을 보여준다.
(환경을 위한) 중고품 거래가 과거에는 아름다운가게나 아나바다운동 등 공익단체의 조직적 활동으로 이루어졌다면, 현재는 당근(마켓)을 통해 더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로 인해 비영리단체의 활동이 위축되거나 제한되는 영향을 받고 있다. 발달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에 애쓰는 복지 기관과 단체들이 많지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와 ‘우리들의 블루스’라는 영화를 방영한 넷플릭스가 짧은 기간에 더 많은 성과를 냈다고 평하는 이들도 있다.
기업들은 전통적인 일방향성 사회공헌인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을 넘어 전략 차원인 CSV(Creating Shared Value), 경영 레벨 차원인 ESG(Environmental, Social, and Governance) 담론을 만들어내며 공익활동의 주축으로 변모하고 있다. 사회적경제 조직들이 생겨나면서 영리와 비영리의 경계 역시 모호해졌다. 신발 하나를 사면 아프리카 아이에게 신발 하나를 기부하는(One for One) 탐스슈즈의 비즈니스 모델은 매우 ‘공익적’이지만 법적으로 영리기업이며, 사회문제 해결형 제품과 서비스 제공하는 소셜벤처들도 대부분 ‘주식회사’ 법인격이다. 말 그대로 공익사업은 더 이상 비영리 공익단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시민사회에 친화적인 민주 정부들을 거치면서 많은 공익 주제가 정책화·제도화되어 행정 영역으로 편입된 것도 단체들의 활동 위축에 일부 영향을 주었다. 시민사회단체의 고유목적사업이었던 것들이 정부나 지자체의 정책사업으로 자리 잡았다.
또, 안정적인 인건비와 사업비를 보조금으로 받는 다양한 센터들이 생겨나면서 일선 단체들의 의제 생산력과 사업 주도권이 일부 왜곡되기 시작했고, 일부 사업들은 중복 논란 끝에 사라지기도 했다. 이처럼 공익 아젠다·이슈·사업에 대한 기업, 민간, 정부·지자체·공기관 등의 참여로 공익 생태계에서 기존 단체들의 지분은 점차 축소되고 있다.
시대가 변했다는 것을 모르는 단체들은 없다. 하지만 발 빠르게 변화에 맞춰 자신들의 미션과 사업, 조직문화, 업무 수행 방식을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중단하기가 쉽지 않다. 기존 사업들을 정리하자니 여전히 필요해 보여 버리기 어렵고, 새로운 사업을 시도하자니 재원도 없고 방법도 모른다. 과거가 미래의 발목을 잡는 격이다.
또한 이전에 효과가 있었던 방법론이 지금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 환경단체는 그동안 진행해 왔던 오프라인 ‘환경영화제’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일반 사회에서도 영화 소비 트렌드는 오프라인 영화관에서 넷플릭스와 같은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OTT)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환경 인식 제고라는 사회적가치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온라인 영화 상영으로 참여(관람)의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이벤트 성격의 ‘아는 사람만 오는’ 오프라인 행사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이전의 성공 공식들이 무용지물이 되는 세상이 왔다. 발전적 해체만이 답이라는 것을 알지만, 새로운 성공 공식에 대한 무지와 역량 부족으로 전환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