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국제도서전에 갔다가 <작업자의 사전>이라는 책을 만났어요. 읽다 보니 ‘노동’에 관해 인식하고 정의하는 저자의 관점이 굉장히 흥미로웠는데요(덕분에 책에는 밑줄 파티가 열렸습니다). 오늘은 이 책의 저자 중 한 분인 구구님을 만나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독서공동체 들불을 기획·운영 중인 구구 님은 책을 읽는 행위가 사회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는 북클럽과 더불어 <케이팝 하는 여자들>, <머니 맨숀>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 구조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들여다보고 질문하는 일을 지속하고 있죠.
1인 작업자이자 공동체 운영자로서의 고민과 꿈을 품고 있는 구구 님의 이야기, 함께 들여다볼까요?
| 구구 님은 평소 많은 양의 텍스트를 읽고 공부하시는 것 같아요. ‘좋아하는 마음’ 없이는 힘든 일일 거라 예상하는데, 어떤 계기로 책을 좋아하게 되셨어요?
아버지가 대학 때 순수 학문 공부를 하고 싶어 하셨는데, 집안 사정 때문에 좌절된 일이 있어요. 대신 그걸 책을 사들이는 일로 해소하셨죠. 그러다 보니 집에 늘 책이 많았어요. 그렇게 자연스레 책을 접하면서 좋아하게 됐어요.
고등학생 때까지는 독서를 향한 관심이 시들했다가 대학교 입학 후 도서관을 만나고 다시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렇게 큰 도서관 처음 봤거든요. 너무너무 좋더라고요. 도서관에 살다시피 하면서 독서에 다시 빠져들었어요.
| 보통 한 달에 몇 권 정도 읽으세요?
한 달에 완독하는 건 25권 정도예요. 병렬 독서를 하거나 참고하는 책은 20권 정도 되고요.
| 와, 엄청 많이 읽으시네요. 요즘은 주로 어떤 책을 읽으세요?
팔레스타인 문제 관련 책들을 주로 읽고 있어요. 곧 들불에서 <우리를 잇는 책 읽기>라고, 한강 작가의 책을 필두로 전쟁이나 재난 관련 책을 읽는 모임을 하거든요. 그 모임에서 참고하려고 <팔레스타인 비극사>를 읽고 있고요. 절판됐던 책인데 이번에 복간돼서 팟캐스트에서 소개해 보려고요.
| 도서 <작업자의 사전>에서도, 들불의 다양한 프로그램에서도 구구 님의 글에는 계급과 사회구조에 관한 탐구가 드러난다고 느꼈어요.
학생 때 학습지 노조의 시위 현장에 지원하러 나갔어요. 사회를 처음으로 구조적으로 바라보게 된 계기였죠. 당시 저는 사회가 이미 조화로운 상태에 있고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건 개인의 문제일 거라고 여겼어요. 그렇게 시위 현장에 나가서 노조 구성원들과 한 명 한 명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들이 정말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걸 알게 됐죠.
그전까지는 이들이 게으르거나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회사 측에서 절차에 따라 해고한 것으로 생각했어요. 해고라는 결과 자체보다 그 절차가 잘못되었을 거라 짐작했거든요. 그런데 직접 만나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때 처음으로 사회가 기울어져 있다는 걸 인식했어요. 이후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갈등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봤고 공부도 그렇게 이어졌던 것 같아요.
| 사회문제를 구조적으로 바라보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북클럽에서 참여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이런 구조적인 맥락을 짚어보는 경우가 많은데요. 참여자 중 여성의 비중이 특히 높고, 종종 우울증이나 조울증 같은 병리적 증상을 겪고 계신 분들도 있어요. 이런 분들이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만 찾곤 해요. 그럴 때 사회적 구조를 함께 살펴보면, 자신을 탓하는 마음이 줄고 문제의 원인을 더 넓게 이해할 수 있게 돼요.
| 책을 읽는 것도 사회 변화 활동의 일부가 될 수 있을까요?
네, 일부도 될 수 있고 전부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활동가 동료들과 자주 논쟁을 벌이기도 하는 주제예요. 현장에서 활동하는 동료들 중 몇몇은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 게 무슨 혁명이 될 수 있겠냐?”고 하시죠.
하지만 책을 읽는 행위는 내가 속한 세계의 형태를 새롭게 재조립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책을 통해 어떤 문제의 원인을 내 안에서 찾는 게 아니라, 더 넓은 사회적 맥락에서 찾게 되니까요. 그러려면 먼저 나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나를 재조립한 뒤에는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도 바뀌죠.
그래서 책을 통한 변화가 개인에게 일어날 때마다 저는 그게 일상의 작은 혁명이라고 봐요. “혁명”이라는 단어가 조금 거대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결국엔 '변화'를 의미하니까요.
| ‘들불’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탄생했나요?
기존 들불 고정 멤버 중 어느 친구가 “멀리 번져가자”는 의미로 들불이라는 이름을 제안했어요. 2021년도에 사업자를 내면서 브랜딩 상담을 받았는데, 이름을 바꾸는 건 어떠냐 조언하시더라고요. 무섭고 강한 느낌이 있다고 하시면서요(웃음). 그때 고민을 좀 하다가, 들불이 여전히 마음에 들어서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요.
| 들불은 어떤 분들을 대상으로 하나요?
사회 문제에 얕은 관심이 있는 대중 독자예요. 혼자 책을 읽기 어려워하는 분, 그러나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는 분을 대상으로 해요. 하지만 실제로는 연구자나 활동가분들이 주로 오셔서 내용의 난이도가 올라가는 편입니다. 몇몇 대중 독자분들은 당황하는 때도 있고요.
| 대중 독자를 만나고 싶으신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제가 하는 일이 기본적으로 ‘설득’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활동가나 연구자분들은 이미 어떤 문제에 정통하신 분들이라, 제가 설득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대중 독자들을 많이 만나고 싶습니다.
| 들불 웹사이트를 살펴보면서 ‘이 분야에 무지한데, 흥미로워서 가보고 싶다. 이 분야에 대해 전혀 모르는 데 참여해도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장벽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 있나요?
모임 참여자의 이해도를 파악하기 위해 사전 설문을 받기 시작했어요. 설문은 2분 정도면 작성할 수 있는 객관식 문항인데요. 예를 들어 한강 작가의 책으로 진행하는 북클럽에서는 제주 4.3이나 광주 5.18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묻는 거죠. 이렇게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모임 난이도를 조절해요.
연구자나 활동가분들께는 발언 순서를 뒤로 미뤄달라고 부탁하기도 해요. 이분들의 관점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먼저 발언하면 다른 참여자들이 위축될 수 있거든요. 발언을 채팅으로만 받기도 하고, 참여자들이 더 편안하게 발언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 들불에서는 주로 어떤 소재를 다루시나요?
노동, 계급, 여성에 대해 주로 다뤄요. 이 분야에 가장 관심이 많고, 최근에는 팔레스타인 전쟁처럼 재난에 관련된 것들에도 눈이 가더라고요. 사실 ‘페미니즘’이 다른 주제를 모두 포괄하고 있긴 합니다.
| ‘여성들과 함께 읽고 움직이는 커뮤니티’로서 들불이 가진 차별점은 무엇일까요?
가장 중점을 뒀던 부분은 ‘다른 독서 모임에서 읽지 않는 책을 읽는다’였어요. 출판계 동향 리포트를 보면 언제나 여성 독자가 많거든요. 의도하지 않았지만, 여성 독자들이 많이 모였죠. 여성 커뮤니티라는 정체성도 따로 전략적으로 계획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형성됐어요.
들불은 ‘나’의 문제에서 출발해 그것을 ‘사회 구조’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을지 탐구해요. 다른 독서 플랫폼에서는 이런 흐름이 '나’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곳에 모이는 분들은 이미 자아가 통합된 상태, 즉 자신을 충분히 완결된 존재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짐작해요.
반면 들불에 오시는 분들은 사회 문제로 인해 혼란스럽고 분열된 상태인 경우가 많아요. 그 원인을 사회 구조에서 찾으려 하지만, 사회 탓으로 돌리는 것이 맞는지 주저하고, 혼자서 고민하다 내면에 쌓아두는 분들이 많죠. 그래서 들불은 그분들이 자신의 문제를 사회 구조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조금 다른 독서 모임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