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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2025.04.17
경계를 넘어 집을 짓다
천주교 제주교구 나오미센터 라연우 활동가
오늘의 키워드
#다문화/이주민
#비영리/활동가
#인권
오늘의 질문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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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오늘의 질문
당신이 생각하는 공공의 공간은 무엇인가요?

“사람들은 경계를 긋고 네가 어느 쪽에 서 있는지를 묻지. 하지만 난 경계 자체가 되고 싶어” 

영화 「미나리」에서 정이삭 감독은 이민자의 정체성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한국계 미국인 가족이 아칸소에 정착하며 겪는 이야기를 통해, 그는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의 삶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낯선 환경에서 뿌리를 내리려는 노력, 받아들여지지 않는 아픔, 그리고 결국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삶을 일구어가는 과정은 인종과 국적을 넘어 공감을 불러일으켰죠. 한국 사회에서도 많은 이들이 이런 경계 위에서 살아갑니다.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은 그 경계에 선 채 13년간 자신만의 집을 지어왔습니다. 타국에서 새로운 이름을 얻고, 다른 언어로 일상을 채우며 두 문화의 경계가 되어 온 사람. “이제야 정말 집이 생긴 것 같다”는 그의 말에는 ‘떠다니는 삶’에서 벗어나, 마침내 단단한 땅을 밟게 된 안도감이 담겨 있습니다. 그가 경계를 넘어 지은 집의 이야기를 통해, 다양성이 공존하는 사회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제주도에서 찾은 새로운 집


| 2012년에 한국에 입국하셨죠. 시리아를 떠나 한국, 그리고 제주도를 선택하게 된 과정이 궁금해요.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젊은 남성들의 징집이 계속됐어요. 세 번의 검문을 거치고 고국이지만 시리아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마침 동생이 제주도에 있었어요. 그렇게 한국에 왔죠. 물론 한국에서도  시리아 사람들이 많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도 갈 수 있었죠. 하지만 시리아에서 좋지 않았던 기억들이 있어 그냥 제주도로 내려왔어요. 그때 제주도에 있었던 동생은 서울로 갔지만,  저는 제주도가 좋아서 머물게 됐어요. 그렇게 제주도에서 자리를 잡은 지 벌써 13년이나 지났네요.

| 제주도에 머물면서 난민 체류 신청을 하셨죠. 그때 상황은 어떠셨나요?

이주 경험이 있다면 다들 비슷하겠지만 난민 신청 과정과 결과를 기다리는 게 힘들었어요. 제가 한국에서 살고 있는 건 똑같은데 결과가 계속 안 나오니까 “혹시 접수가 잘못됐을까? 불인정일까? 안 받아주는 건가?” 이런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출입국 사무소에 가서 몇 번이고 결과를 물어보고, 언제쯤 알 수 있냐고 확인했어요. 그래서 출입국 사무소에서 제가 꽤 유명했어요.(웃음) 그렇게 1년이 지난 뒤에야 체류 허가를 위한 인터뷰를 볼 수 있었죠. 인터뷰까지 기다린 1년이 얼마나 길었는지 몰라요. 

인터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어려움이 있었어요. 출입국 사무소의 심사 인터뷰는 현지 언어가 기준이에요. 하지만 제주도에 아랍어 통역사가 없었어요. 저도 영어가 편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꼭 인터뷰를 보고 싶었어요. 그때 정말 간절했어요. 영어로 인터뷰를 준비했고 마침내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을 수 있었죠.

| 인도적 체류 허가 이후의 일상은 어땠나요?

한국의 청년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보냈어요. 아르바이트도 하고요. 제주도에서 처음 카페모카를 마셔봤는데, 너무 맛있었어요. 또 라테아트로 그림도 그려주시잖아요. 아트가 된 커피를 보면서 ‘이건 어떻게 만들지?’하는 생각이 들었고, 찾아보니 바리스타라는 직업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었어요. 한국 청년들이 많이 쓰는 알바몬 앱을 다운받아서 카페 아르바이트를 찾았어요.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으니까 아무래도 바리스타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는 게 어려웠죠. 그래서 서귀포의 식당이나 다른 쪽에서 일을 하다가 한국어를 익히고 다시 구직 활동을 했어요. 당시에는 서귀포에 살고 있었는데, 제주시에 있는 카페까지 가서 아르바이트하고 싶다고 사장님들께 적극적으로 어필하면서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수 있었어요.

바리스타로 근무하며 라떼아트를 하고 있는 모습  | ⓒ라연우

| 바리스타라는 선택이 흥미롭네요. 바리스타로 일하셨을 때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손님들과 대화할 기회가 많지는 않았어요. 주로 주문받고 계산하고 끝이었죠. 그런데 어떤 여자분이 커피를 시키고 나서 영수증을 드리고 가셨는데, 갑자기 돌아와서 영수증을 돌려주시더라고요. 받아보니 뒤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어요. 그게 아직도 기억에 남네요.(웃음) 물론 연락은 안 했지만요. 그 외에도 신기하게 행동하는 손님들도 있었고, 조금 쌀쌀맞게 대하는 손님들도 있었어요. 정말 다양했죠. 하지만 카페에서 일하면서 한국어가 많이 늘었어요. 짧은 문장이라도 매일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어가 익숙해졌어요.

| 정말 한국 청년의 삶을 경험하셨네요. 귀화를 결심하게 된 계기도 들려주세요.

귀화는 시리아 상황이 악화되면서 결심했어요. 특히 한국에는 시리아 대사관이 없어요. 그래서 일본에 있는 시리아 대사관을 통해 여권 연장을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내전이 계속돼서 그런지 여권 연장을 해주지 않았어요. 그저 “시리아에 가서 연장하세요”라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어요. 국가가 저를 보호한다기보다는 어떻게든 저를 도와주지 않으려는 느낌을 받았어요. 

타고난 국적으로 인해 정당하게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일상에 회의감이 들었어요. ‘나라가 없다’라는 생각을 하곤 했죠. 그때 이미 한국에서 8년 넘게 살고 있었는데도 소속이 없는 느낌이었어요. 땅에 발을 딛고 사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계속 떠다니는 삶이었죠. 아는 사람은 전부 한국인들이었지만 한국 사람들에게 저는 시리아 이방인이었어요. 그런데 시리아 사람으로서 여권도 없었잖아요. 결국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이었던 거죠. 그래서 귀화를 결심했고, 사회통합 프로그램에도 참여했어요.

귀화 후 신분증을 발급받기 위해 처음으로 찍은 증명사진 | ⓒ라연우

귀화 이후에는 정말 ‘집’이 생긴 것 같았어요. 주민센터도 갈 수 있고, 어디서든 “저는 한국인이에요”라고 말할 수 있었어요. 체감한 가장 큰 변화는 출입국 사무소에 가지 않아도 되는 거였어요. 이전에 3개월마다 체류자격을 연장하러 가는 게 스트레스였어요. 더 이상 출입국 사무소에 가지 않아도 되고 신분증을 당당하게 내는 용기도 생기고, 어디서나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죠.

| 정말 한국 사람이 되셨네요. 한국 생활 중 가장 큰 성취감을 느꼈던 순간이 있을까요?

귀화하면서 국민선서를 하던 날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귀화를 하면 국적법에 따라 국민선서를 해야 하거든요. 처음 허가 전화가 왔을 때는 믿지 않았어요. “귀화 허가 나왔다”고 하길래 “정말이냐”라고 물었죠. 내가 시리아 국적이고 난민이고 인도적 체류 허가자고, 한국에서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나이도 어리니까 ‘설마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마음속으로는 무조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허가가 나오기 전에 하도 걱정을 했는지, 꿈에  당시 임기 중이던 문재인 대통령이 나오셨어요. 진짜로요. 로또를 살까 하다가 안 샀어요. 하지만 로또를 안 사길 잘했죠. 지금 생각해 보면 대한민국이 한국 국민으로 받아준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국민선서를 하고 증서를 받는 순간, 그 느낌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증서를 받으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이제 정말 안전하고 의지할 수 있는 우리 집이 생긴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귀화 이후 처음으로 병원에 가서 신분증을 내밀 때의 느낌이 정말 달랐어요. 이제는 외국인 등록증이 아닌 주민등록증을 보여드릴 수 있으니까요. 은행 계좌나 카드를 모두 새로운 이름으로 바꾸면서 제가 정말 한국 사람이 되었다고 체감했어요. 뭘 먼저 해야 할지 정신이 없었지만, 하나하나 바꿔나가는 게 행복했고 또 새로운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귀화 허가 후 국민선서를 하는 모습 | ⓒ라연우

두 세계 사이에서 : 중간자로 살아가기

| 귀화를 준비하던 중 바리스타에서 난민 지원 활동가로 직업을 전환하셨어요. 그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처음부터 활동가로서 의지가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그때의 저는 바리스타로 만족하면서 일하고 있었고, 그 카페에서 오래 일하면서 매니저로 승진도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점심시간에 페이스북을 봤는데, 모르는 사람한테 연락이 온 거예요. 아랍어 메시지로 도와달라고요.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제주도로 와서 난민 신청을 했는데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70명이나 왔다고 해서 깜짝 놀랐죠. 하지만 당시에는 제가 적극적으로 그들을 돕는 게 조심스러웠어요. 출입국 사무소에 가서 도움을 받으라고 안내했어요.

그리고 며칠 후에 제주시청 근처를 걸어가는데 아랍어가 들렸어요. 여행객일까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에 한국에 온 500명의 예멘 난민 중 일부였어요.  출입국 사무소에 가니 예멘 사람들이 바글바글했죠.  마침 출입국 사무소 직원이 저를 잘 알고 있었어요. 혹시나 싶어 “통역이 필요하면 지원하겠다”라고 여쭤보니 바로 요청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바리스타 일과 함께 아랍어 통역도 했죠. 통역과 더불어 텐트나 음식을 나눠주는 봉사도 했어요. 당시 예멘 난민들이 거처가 마땅치 않아 정말 길에서 머무는 일들이 잦았거든요. 봉사활동을 하던 중에 나오미센터 신부님께서 난민 지원 활동가 제안을 해주셔서, 지금은 활동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2019년 1월부터 일을 했으니, 벌써 7년 차네요. 주로 한국에 처음 들어온 분들을 대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연결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 본인을 ‘중간자’라고 표현하셨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그 사람들의 말도 다 이해하고, 여기 있는 한국 선주민 분들의 말도 다 이해해요. 그래서 어떤 쪽의 편도 들 수 없죠. 예멘 분들이 어떻게 한국으로 왔고, 왜 왔는지 다 듣고 이해했거든요. 하지만 제주도 분들의 불안감과 무서움도 다 이해해요. 무작정 “나가라”라고 할 수도 없고, 다른 한편에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도 할 수 없죠. 그래서 늘 중간 지점에 있다고 생각해 왔어요.

특히 통역을 하는 사람은 중간을 유지하는 게 원칙이거든요. 직업적으로도 그렇고 문화적으로도 그렇고 계속 중간을 유지했던 것 같아요. 때로는 힘들지만 양쪽을 다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저니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다만 서로를 설득시켜야 할 때, 그리고 설득의 난이도가 높을 때, 일이 두 배가 되죠.

| 귀화 그리고 난민 지원 활동가로의 전환 이후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이 있을까요?

가장 크게 느낀 건 도움을 받는 사람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의 변화라고 생각해요.  전에는 제가 약하고 힘들고 아프니까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어요.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고, 많은 분들이 옆에 계셨어요. 저는 옆에 있었던 분들 덕분에 여기까지 온 거라고 생각해요. 친구들이라든지, 저를 도와준 단체나 활동가들, 낯선 외국인을 고용해 주신 사장님, 진료비를 싸게 해 준 의사 선생님들이요.

이제는 한국인이 되었고, 상황이 많이 나아졌으니까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요즘에는 법무부 사회통합멘토단으로도 활동하고 있어요. 정말 극적인 변화죠. 이제는 이주민뿐만 아니라 여기 도움이 필요한 한국인들도 아낌없이 돕고 싶어요. 제가 받은 도움을 누군가에게 돌려줄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광주세계인권도시포럼에서 발표하는 모습 | ⓒ광주세계인권도시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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