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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24
지역에 관계라는 뿌리를 내리는 중입니다
임팩트스퀘어 우아영 매니저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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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생각하는 공공의 공간은 무엇인가요?

넷플릭스 시리즈 '퀸스 갬빗'에서 체스 천재 베스 하몬은 말합니다. "체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움직임이 아니라 뿌리내릴 자리를 찾는 거예요" 체스판 위에서 말들은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각 말이 자리 잡은 위치와 다른 말들과의 관계입니다. 한 말의 가치는 그것이 얼마나 빨리, 얼마나 멀리 움직일 수 있는가보다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일지 모릅니다.

서울이라는 체스판을 떠나 경상북도 영주라는 새로운 판에 말을 놓은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자신의 말을 단단히 놓을 자리를 찾아가는 동시에, 같은 여정을 걷는 다른 이들의 말이 방향을 찾도록 돕습니다. 지역에서의 관계는 때로는 무겁지만, 그 관계들이 모여 만드는 네트워크는 결국 지역의 지속 가능성을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 그녀는 커뮤니티를 엮고, 사람들을 연결하며, 각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지역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그녀가 지역에서 발견한 새로운 성장의 과정입니다. 


아파트 키즈, 낯선 세계를 상상하다

서울은 당연한 나의 세계였다. 매일 아침 마주하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과, 또 그만큼 엄청나게 많은 빌딩, 밤늦도록 꺼지지 않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는 서울 밖에서의 삶을 상상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십 대 후반, 직장에서는 삼 년 차였던 나는 또래 친구들처럼 이직을 고민하며 매일을 빠듯하게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채용 공고를 보게 되었다. 업무는 내게 잘 맞았지만, 근무지가 경상북도 영주시라는 점이 망설이게 만들었고, 결국 ‘뒤로’ 버튼을 눌렀다. 그때 함께 일하던 친구 A가 문득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파트 키즈로 태어나서, 죽을 때도 아파트에서 죽겠지?” 나 역시 아파트에서 태어났고, 아파트에서 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했으며,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다니며 살아왔다. 말 그대로 아파트 키즈였다. 그저 농담처럼 들렸던 그 말이 며칠 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대화 속 ‘아파트’라는 단어는 어쩌면 ‘도시’, 그리고 ‘서울’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나는 이만큼의 세계만 보고 살아가게 될까?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니,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와 그 안의 사람들이 화분에 심긴 작은 나무처럼 보였다. 그날, 나에게 너무나도 당연했던 도시의 크기를 의심하게 됐다. 

그 이후, 처음으로 서울 밖에서의 삶을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상상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나는 상상력이 풍부한 편이 아니었고, 그래서 경험을 통해 판단해 보기로 했다. ‘뒤로’ 버튼을 눌렀던 그 채용 공고에 다시 지원했고, 서울과 아파트라는 ‘화분’ 같은 익숙한 세계를 벗어나 경상북도 영주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좌)영주 임팩트스퀘어 전경 (우)STAXX 사업 포스터 | ©임팩트스퀘어

관계라는 뿌리를 내릴수록 단단해지는 일

도시에서는 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필수적인 관계망이 형성되곤 했다. 또 이를 유지하는 데는 때때로 인사를 나누는 정도로도 충분했다. 도시는 빠르게 변하고, 역할 중심으로 움직인다. 사업 담당자가 자주 바뀌고, 협업은 관계보다 역할에 초점이 맞춰진다. 네트워크와 신뢰가 업무를 더 원활하게 만들긴 하지만, 담당자가 바뀌어도 업무는 문제없이 흘러갔다. 필요한 순간에만 관계를 맺어도 충분했던 셈이다.

하지만 지역에서는 관계망이 대부분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다. 그래서 일도 사람을 따라 움직인다. ‘누가 하느냐’가 무척 중요하며, 그 사람과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지가 일의 가능성을 좌우하기도 한다. 지역에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지역 안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일과도 같다고 느꼈다. 그것은 마치 나무가 땅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과도 비슷하다. 꽃을 피우고 가지를 뻗는 것은, 뿌리가 자리를 잡은 뒤 에야 가능한 일이다. 많은 일들이 결국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가’에 따라 결정됐다. 이곳에서의 관계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과도 연결된 필수 조건이었다.

특히 예상치 못한 상황도 관계 덕분에 해결된 경험이 대표적이다. 내가 처음으로 그 힘을 실감한 순간은, 한 달간 준비했던 플리마켓 당일이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고, 음향 장비를 보호할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행사가 많지 않은 지역에서 천막을 급히 구하는 건 도시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때 함께 일하던 기관 담당자가 지인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고, 농사를 짓고 있던 지인이 마침 대형 천막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 덕분에 플리마켓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창업가 네트워킹 과정을 진행하고 있는 우아영 매니저 | ©임팩트스퀘어

이런 관계의 힘은 나 개인뿐 아니라, 중간 지원자로서 역할하고 있는 우리 조직에도 해당된다. 외부에서 들어온 기업이나 기관이 지역 내 커뮤니케이션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는 단지 언어나 방식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라, 지역의 흐름을 이해하고, 누가 어떤 맥락에서 중재할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 꼭 필요하다. 그럴 때, 우리 조직은 쌓아온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정확한 연결 지점을 찾아주려 노력한다. 이런 경험들이 쌓일수록, 지역에서의 일은 결국 관계 위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지금도 나와 우리 조직은 ‘일’이라는 나무를 키우기 위해, 관계라는 뿌리를 이 땅에 더 깊고 단단하게 내리는 중이다.

물론, 이 관계들이 언제나 편안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일의 가능성을 좌우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치는 ‘관계’는, 때로는 나의 삶을 괴롭게 만들기도 한다. 지역 내 촘촘한 관계망은 어느 순간부터 나의 업무 성과를 판단하는 기준처럼 여겨졌고, 그 자체가 부담이 되었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성과를 내고 있다’는 감각이 있었고, 반대로 느슨해질수록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이 생겼다. 사적인 관계 속에서도 어떤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에 조직의 입장을 함께 고려해야 할 것 같은 감정이 나를 짓누르곤 했다. 이런 스트레스와 부담은 지역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마주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닥치는 일은 단지 ‘업무’로 끝나지 않고, 관계와 얽히며 판단과 감정까지 따라온다. 이 밀도와 무게는 지역에 산 지 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낯설고 부담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관계 속에서 많은 위안을 얻었고, 예상치 못한 따뜻함을 자주 마주했다. 영주에서 맞은 첫겨울, 내가 일하는 공간을 청소해 주시던 여사님께서 김장김치 한 포기를 선뜻 나눠 주셨다. “혼자 타지에 살다 보면 김장김치 먹을 일이 잘 없지?” 하시며 건넨 그 말이, 내가 영주에서 처음 느꼈던 관계의 따뜻함이었다. 김치통을 깨끗이 씻어 귤을 가득 담아 돌려 드렸고, 이후로 여사님은 말린 시래기나 찐 옥수수처럼 자취생에게는 귀한 식재료들을 종종 나눠 주셨다.

이뿐 아니라 업무 중에도 따뜻한 순간은 찾아왔다. 내가 운영하던 커뮤니티 프로그램에 여러 번 참여했던 한 대표님이, 어느 날 프로그램이 끝난 뒤 말했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어줘서 고맙다. 아영님이 영주에 와서 참 좋다.” 그 말은 어쩌면 그날의 평범한 인사였는지 모르지만, 나에겐 영주에서 계속 일할 수 있게 해주는 큰 원동력 중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관계는 단순히 일이 굴러가게 만드는 수단을 넘어,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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